2007년 10월 8일 월요일

근무시간 줄여야 선진국 된다.

"선진국이 되어야 근무시간이 준다."와 "근무시간을 줄여야 선진국이 된다."는 명제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답을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처럼 사회가 복잡하게 연결된 상황에서 인과 관계를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래도 십수년의 직장 생활에서 얻은 직관을 믿고 몇가지 설명을 붙여볼 생각이다.

선진국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근무시간을 줄이는 것 모두 한국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하지만 근무시간을 줄이는 것은 나 또는 내 부서 또는 내 직장(또는 회사)부터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은 용이한 면이 있다.

최봉섭님의 '조카 관찰기' 시리즈는 참으로 흥미롭다. 최근 글에서는 한국의 잃어버린 가정에 관한 애석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가 가정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데는 최봉섭님이 선진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퇴근 러쉬아워는 4-5시 쯤이니 퇴근하고도 훤한 9시까지 너댓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필자는 한국에 있을 때 하루 열여섯 시간 정도를 근무한 적이 매우 많았다. 근무시간이 길다 보니 출퇴근이 너무 어려워 사무실 근처의 여관과 흥정하여 숙소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물론 국민들이 열심히 일한 것이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아닐 것 같다.

1. 창의력
바쁜 회사건 바쁜 사람이건 대체로 급한 일에 매달려 있다. 그 일이 가치 있는 일인지 아닌지는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학생은 당장 다음 주에 시험을 치러야 하니 문제집을 풀어야 한다. 회사에선 하던 일에 일이 자꾸 추가되니 날로 바빠져만 간다.

하지만 그 일을 왜 해야 하는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할 수 없는가?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일은 답습되고, 학생을 그저 외우기만 한다.

2. 가정
가정도 회사처럼 경영이 필요하다. 한 가정의 발전 전략, 가족 내외의 인간 관계, 자녀에 대한 격려와 보상, 이 모두 잠만 자는 집에서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상담을 해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자녀들과 대화를 잘 해보고 싶지만 아이들의 관심사를 잘 알지 못한다.

배우자와 로맨틱한 이벤트를 가져보고도 싶고, 친구를 불러 포도주를 마시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꿈도 꾸지만, 그냥 꿈이다. 시간이 있다고 모두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벼르고 별러도 좀처럼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

3. 평생 학습
지금은 작년이나 올해나 비슷한 농경사회가 아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변화하는 지식사회다. 하루라도 배움을 게을리하면 따라잡기 조차 힘든 세상을 살고 있다. 저개발 국가에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 한 배워야 한다. 어쩌다 짬이 나면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기 보다는 밀린 집안 일을 하기에 바쁘다.

나의 어린 시절과 내 자녀의 어린 시절이 엄청나게 바뀌어 있음도 배워야 하고, 그래서 부모의 역할도 상당 부분 바꿔야 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근무시간이 짧아 진다면 이런 일에 시간을 투자할 가능성이 많아질 것이다.

4. 일자리 나누기
회사가 정말 값어치 있는 일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면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실업 문제의 좋은 해결 방안이다. 저가치 업무에 직원의 시간을 쓰고 있다면 그냥 일찍 집에 돌려 보내면 된다. 21세기에 직원을 비용으로 생각하는 회사는 망한다. 직원 없이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회사는 없다.

근무 시간이 짧은 직장인은 자기 개발에 시간을 쓴다. 그게 잘 안되면 회사가 도와주면 된다. 직원의 자기개발에 투자해서 실패한 회사는 별로 없다.

5. 여가
위의 실용적 효과를 빼고서도 근무시간을 줄이는 것은 인간의 행복 추구와 웰빙의 절대 조건인 여가를 제공하는 것 만으로도 정당화 될 수 있다. 퇴근 후 빈둥빈둥 아무 일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원래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모습의 하나이다.

일주일 40시간 보다 일을 덜하는 것이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동안 바빠서 공부를 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노동생산성과 왜곡 보도

한국인의 노동생산성이 세계 꼴찌 수준이라는 언론보도는 절망과 죄책감을 안겨준다. 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 언론의 보도 뉴앙스로 보면 그렇다. 우리는 한심한 노동자인 것 같다. 하지만 정작 한심한 것은 그렇게 밖에 보도하지 못하는 언론의 수준이다.

필자가 영국에서 처음 대형마켓 계산대에 섰을 때 카운터의 노동자는 동작이 너무 느려서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어딜 가나 비슷해 보였다. 때론 답답함도 느꼈지만 나중에는 참 여유가 있구나 하며 부러워하게 되었다. 저렇게 일해도 4만불이라니... 러시아워는 퇴근 시간인 오후 4시반, 그들은 필자가 일하던 것의 반이나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2만불.

우리는 틀림없이 그들보다 일을 많이 하고 잘 한다. 그런데 어째서 노동생산성은 하위권인가? 그것은 노동생산성의 산정 방식이 노동생산성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노동생산성의 산정방식은 투입한 노동시간으로 생산된 물건(서비스)의 가격(양이 아님)을 나눈 것이다. 예를 들면 국민총생산을 국민 총노동시간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물건을 만들어도 그 물건을 비싸게 팔면 노동생산성은 올라간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인식하는 노동의 질과는 관련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회사의 질과 관련이 높다. 청바지 하나를 만드는 데 투입되는 노동시간은 큰 차이가 없지만 팔려나가는 가격은 브랜드(회사)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즉 똑같은 질의 노동을 해도 어느 회사의 청바지를 만드냐에 따라 노동생산성을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또 손으로 청바지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자동화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생산성이 높게 나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실질적 노동의 강도와 질은 후자가 더욱 낮다.

그러므로 노동의 생산성이 노동의 질과 관련이 있는 곳은 오히려 투자자 및 경영진과 연구진들의 노동이다. 설비 투자나 마켓팅, 경영 개선, 연구 개발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 노동생산성이 낮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이 노동자의 책임처럼 느껴지게 보도하는 것은 넌샌스다. 노동생산성을 올리려야 한다면 노동자에게 손발 보다는 머리를 쓰는 시간을 많이 주어야 한다. 지식사회의 요청이기도 하다. 이는 경영진의 경영 방식에 관련된 몫이다. 언제까지 몸만 부려 돈을 벌려고 한단 말인가?

노동생산성이 낮은 것이 마치 노동자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보도하는 것은 왜곡 보도와 다를 바가 없다. 노동생산성이 왜 낮게 나오는 지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진정한 사실 보도이다.